아라리 난장1
아버지 말대로라면, 그의 조부는 열 여섯 살 때부터 물치어장을 비롯한 혼천 등지의 장터를 조랑말 두 필로 발서슴한 소문난 선질꾼 이었다. 그때는 대개 밤길을 도와 이동했으므로 그의 조부가 격투를 벌여 사로잡은 호랑이도 둘이나 되고, 개호주까지 합치면 그 가죽이 한 축은 될 것이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텅 빈들에 혼자서 있었다.
삼십대 이르러 조부는, 농사까지 팽개치고 홀딱 벗은 선질꾼으로 나서자 치부한 다음 서울로 이주했기 때문에, 창법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고향은 서울인 셈이었다. 어쩌면, 이곳이 옛 장터였다는 지표석(址慓石) 이라도 꽂혀 있음직하여 노둑길을 따라 살펴보았으나 헛수고였다.
며칠 전에 우연히 장터 어물전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신문지를 주워 본 일이 있었어. 그 신문 일면에 커다란 컬러 사진 한 장이 게재되어 있었어.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가정에서 내쫓김을 당한 수십 명의 사회적 망명자들이 서울역 구내에 설치된 간이의자에 줄지어 앉아 새우잠을 자고 있는 장면이었어. 흡사 오늘날 가장들이 겪고 있는 좌절과 고통이 이것입니다 하고 사열을 받고있는 것 같아서 바라보고 있을수록 쓸쓸한 영상이었지. 나와도 무관하지 않은 동병상련이어서 자연 오래 들여다봐지더군. 매우 착잡했었지. 지난날에 그들은 물론 한 가정의 대들보였고 걸어다니는 보증수표였잖아. 물리적으로는 역 대합실이 밤중에도 춥지 않다는 이유가 크겠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왜 화필이면 서울역 대합실을 찾아와 노숙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운동의 상태를 언제든지 지속시켜야 한다는 관성(慣性)의 중압감 때문에 어디든 떠나갈 수 있는 곳인 서울역까지 나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운동해야 한다는 관성에 떼밀려 그곳까지 나오긴 했는데 그러나 막상 갈곳이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면서 관성에 대한 대항력(對抗力)을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하지 않고 정지되어 있는 그들은 그래서 나무 그늘에 앉아 졸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보다 더욱 처량해 보였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