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베개
이광수를 대표하는 계몽주의 문학은 17~18세기 유럽의 반(反)봉건적 ·합리주의적 사상을 배경으로 한 문학이다.
한국문학에 있어서의 계몽주의란, 신문학 초창기에 새로운 문학양식과 가치관을 받아들임으로써 전통문화와 새로운 문화양식의 갈등을 지양하고 새로운 문학과 예술, 가치관을 보급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광수가 계몽주의적 경향을 나타낸 최초의 글은 《정육론(情育論)》인데, 그는 여기에서 어린이의 교육은 무엇보다도 정서교육을 중시해야 한다는 진보적 교육관을 내세움으로써, 이(理)와 지(知)에 치우친 과거의 인간관과 교육관을 전적으로 부정하였다. <어린 벗에게> <무정(無情)>은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을 소설로 작품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지팡이를 끌고 절 문을 나섰다. 처음에는 날마다 돌던 코스로 걸으려다가 뒷 고개턱에 이르러서, 안 걸어 본 길로 가보리라는 생각이 나서, 왼편 소로로 접어들었다. 간밤 추위에 뚝 끊였던 벌레 소리가 째듯한 볕에 기운을 얻어서 한가로이 울고 있다.안 걸어 본 길에는 언제나 불안이 있다. 이 길이 어디로 가는 것인가. 길가에 무슨 위험은 없나 하여서 버스럭 소리만 나도 쭈뼛하여 마음이 쓰인다. 내 수양이 부족한 탓인가. 이 몸뚱이에는 붙은 본능인가. 이 불안을 이기고 모르는 길을 끝끝내 걷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을 보면 길 없던 곳에 첫걸음을 들여놓은 우리 조상님네는 큰 용기를 가졌거나 큰 필요에 몰렸었을 것이라고 고개가 숙어진다. 성인이나 영웅은 다 첫길을 밟는 용기 있는 어른들이셨다. 세상에 어느 길치고 첫걸음 안 밟힌 길이 있던가.내가 걷고 있는 작은 길은 늙은 솔밭으로 산줄기 마루터기를 타고 서남쪽으로 올라간다. 보기 좋은 소나무들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서로 얽히어서 사람의 손 아니 닿은 솔밭에서만 볼 수 있는 경치였다. 솔 수풀에는 언제나 바람 소리가 있는 모양이어서 우수수 소리가 은은히 울리고 산새들의 연연한 노래도 들렸다. 대단히 고요하고 내 마음에 드는 경치였다.이름을 지으려면 무슨 「대」라고 할 만한 봉우리에 올라섰다.
-본문 중에서
1905년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건너감. 1907년 학비를 마련하여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학원 중학부 3학년에 편입. 홍벽초·문일평 등과 '소년회'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여 시·논설 등을 발표.
1917년 장편『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면서 와세다대학철학과에 특대생으로 진학. 1919년 『조선독립선언서』(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해로 망명. 『창조』지 2호 동인.
1921년 『개벽』지에 논문「소년에게」를 발표하여 입건. 1924년 장편 『허생전』을 시문사(시문사)에서 간행. 『금십자가』『재생』을 동아일보에 연재. 단편 「H군을 생각하고」 「어떤 아침」「혈서」등 발표.
1930년 3부작 『군중』『혁명가의 아내』『사랑의 다각형』『삼봉이네 집』을 동아일보에 연재. 『충무공 유적 순례』발표. 1933년 조선일보에 『유정』연재.
1936년 도일하여 일본의 유수 작가들을 만남. 6월 귀국 후 홍지 출판사를 개업하고 단편 「인생의 향기」를 발표. 『이차돈의 사』연재를 끝내고 『애욕의 피안』을 조선일보에 연재.
1941년 동우회 사건이 경성고등법원 상고심에서 전원 무죄판결. 12월 각지를 순회하며 친일 연설. 1947년 『돌베개』『도산 안창호』집필. 『꿈』『나』『백범일지』등을 발표.
1950년 장편 『서울』을 『태양신문』에 연재. 시「구더기와 개미」를 『희망』에 발표. 7월21일 북괴에 납치된 후 생사 불명.
서문
죽은 새
돌베개
백로
나는 바쁘다
우리 소
물
제비집
여름의 유머
살아갈 만한 세상
인생과 자연
인忍 토土
서울 열흘
사랑의 길
인생의 기쁨
내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