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엔 왜 간다는 걸까 그녀는
'누굴…… 찾으십니까?'
현관문을 열고 나가서 내가 물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메리야스 차림이었다. 하도 더워서 창문을 열어놓은 채 맥주를 마시다가 잠이 들었던 것이다.
'혹시 여기 사는 사람을 아시오?'
그가 말했다. 작은 얼굴이 굵고 깊은 주름으로 덮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숙이라지 않더이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껏 그녀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걸 나도 그제서야 알았으니까.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여자분 혼자 살지요.'
'그렇다면 맞을 텐데…….'
'어떻게 오셨는지요?'
나는 그가 그 선생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대답을 못하고 희끗희끗한 살쩍을 손가락으로 슬쩍슬쩍 긁었다. 여기엘 왜 왔는지 그가 내게 대답할 의무는 없는 것이었다.
'혹시…… 그림 그리는 분 아니십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가 금방 반색을 하며 환하게 웃었다. 아무리 봐도 그 웃음은 알아주는 이 없어 늘 외롭던 무명화가의 웃음이었다. '날 아시우?'
그가 내 손을 덥썩 잡았다. 덥썩. 나는 낭패스러웠다. 나는 그의 이름도 그림도 아무 것도 모르지 않는가.
나는 그냥 웃고만 있었다. 그는 감탄하는 것 같았다. 서울 변두리 아파트에서 메리야스 차림으로 낮잠이나 자는 필부마저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사실에 대해.
하지만 나는 반대로 실망하고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무릎을 탁 칠 정도의 화가는 천만 아닌 것 같았으니까. 게다가 그는 미남도 멋쟁이도 아니었다. 박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한 여인이 동맥을 자르고 평생을 흠모할 만큼의 매력적인 구석은 없어 보였다. 도대체 내가 이 사람과 어디가 어떻게 닮았다는 말인가. 흰 바지를 입고 허리를 흔들며 덕암엔가를 간다던 그녀의 뒷모습이 떠올라 나는 그만 실소를 머금었다.
'미리 연락을 하고 오실 걸 그랬습니다.'
내가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온다고 전보를 쳤는데…… 이틀 전에 말이오.'
그가 말했다. 그가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그럼 그녀는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도 그녀는 왜 덕암엘 간 걸까.
1957년 경기도 강화 출생.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마디」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소설집에『노을은 다시 뜨는가』(1990),『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1993),『깡통따개가 없는 마을』(1995),『그녀의 야윈 뺨』(소설선집, 1996),『꿈에 기대어』(짧은 소설, 1997),『도라지꽃 누님』(1999) 등이, 장편소설에『늪을 건너는 법』(1991),『슬픈 바다』(1991),『전장의 겨울』(전2권, 1992),『추억되는 것의 아름다움 혹은 슬픔』(1992),『낯선 여름』(1994),『라디오 라디오』(1995),『비밀의 문』(전2권, 1996),『남자의 서쪽』(1997),『내 목련 한 그루』(1997),『오남리 이야기』(연작소설, 1998),『악당 임꺽정』(전2권, 2000),『정별(情別)』(전자책, 2000) 등이 있으며, 산문집에『인생은 지나간다』(2000)가 있다. 1994년 단편『깡통따개가 없는 마을』로 제27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