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지평선2
과거의 상처로 얼룩진,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아파하던 남창우는 90년대적 가벼움을 상징하는 나수연과, 80년대의 상처를 극복한 김혜정, 지나간 잘못을 용서받고자 몸부림치는 강익수 등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에서 나와 새로운 출발을 준비한다.
존재의 상실과 근원적 탐구라는 윤대녕 문학의 주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해답은 이제 사람들 사이에 있다. 한 시대와, 개인사에 드리워졌던 어두운 그림자를 벗고 사랑으로 화해를 구하는 주인공들의 아픈 몸짓은 그 가능성만으로도 소중한 성과다.
나는 비안개 속에서 떨고 있는 나트륨 등과 상가의 쇼윈도와 불 꺼진 아파트의 창문과 이따금씩 물을 튀기며 과속으로 지나가고 있는 도로의 차들을 멀뚱하게 내려다보며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게 낯선 사람이라 하더라도 가까이 마주앉아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긴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트륨 등에게, 쇼윈도 속의 마네킹에게, 불 꺼진 창문에, 지나가는 차들에, 비에, 그리고 너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지 그래. 할 얘기가 아직 남아 있는데.”
“그건 저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지금부터 당신은 오직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해야만 해요. 저는 아주 잠깐만 당신을 만나기 위해 문지기에게 몸을 허락하고 안으로 들어온 거예요.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가야 해요.”“어디로 말인가?”
“사람들에게 묻고 대답할 수 있는 장소. 당신도 무사히 그곳으로 오길 원해요. 당신의 용서가 필요하고 또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 그런 곳으로 말예요.”그게 어딘가.
“당신이 버리고 온 세상, 그리운 열대.”
“당신도 이제는 돌아올 때가 됐어. 유배를 갔던 많은 이들이 지금 다들 돌아오고 있는 중이야. 내 주위의 얘기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단 말이야. 돌아와서 이제는 저마다 하얀 자전거를 타고 저 영원하고 순결한 달의 지평선을 한바퀴씩 빙 돌아보는 거야. 그러면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두고 아하, 그게 그런 일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거야.”“하얀 자전거요?” “가장 순결한 존재가 타고 다니는 자가용. 번호판은 물론 0번이지.”
“0번.”
“완전하고 무한한 숫자. 절대 끝나지 않는 영원히 맞물려 있는 선. 저 모든 둥근 것들. 달과 해 그리고 하늘의 숱한 별들. 또한 순결을 회복했을 찰나의 너와 나의 모습.”
1962년 충남 예산 출생. 1990년<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94년 제2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 96년 중편 <천지간>으로 제20회 이상문학상 수상. 98년 단편 <빛의 걸음걸이>로 제43회 현대문학상 수상.
주요 저서로 창작집 <은어낚시통신> <남쪽 계단을 보라>, 장편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추억의 아주 먼 곳>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