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병
함대훈은 올바른 외국문학의 번역소개와 한국문학의 중흥·발전을 위해 노력한 작가였다.
그는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기 시작한 해외문학파 동인들의 국내 활동은 192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그들의 주임무는 물론 외국문학 작품의 번역·소개였으나, 창작에도 관여하는 한편 프로문학파를 위시한 비해외문학파와의 치열한 논전을 펼쳤고 저널리즘에서도 괄목할 만한 활동을 보였다.
함대훈을 포함한 해외문학파의 운동은 침체한 민족문학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장차 대두될 순수문학의 문호를 여는 데 기여하였다.
'그런데 강습은 끝마쳤어요?'
영철의 눈이 소희의 불타는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녜 바로 강습이 끝나는 날 그렇게도 무덥더니 골치가 쑤시구 기침이 나구 그리구 열이 올르구 머리가 휑해지겠죠. 그래서 그날 바로 내려 가려던 끝에 그 모양이 됐어요!'
'참 준걸군이 퍽 애썼지요.'
-본문 중에서
'호는 일보(一步)이며 황해도 송화(松禾)에서 출생했다.
1927년 김진섭(金晉燮) ·장기제(張起悌) ·이헌구(李軒求) 등과 함께 《해외문학》 동인이 되고, 1931년 일본 도쿄[東京]외국어학교 러시아어과를 졸업했다. 그해 극예술연구회 조직에 참여하여 러시아 작품을 주로 번역 ·소개했다.
1935년을 전후하여 문단에 행동주의가 소개되고, 휴머니즘이 논의되자, 이헌구 ·홍효민(洪曉民) ·김문집(金文輯) 등과 함께 이를 소개하고, 1935년 《조선일보》에 《지식계급의 불안과 조선문학의 장래》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한국지식인 연맹의 결성을 주장하였다. 1937년 장편소설 《순정해협(純情海峽)》을 《조광(朝光)》지에 연재하고, 이어 《무풍지대》 《폭풍전야》 등을 발표했다. 8 ·15광복 후 《한성일보》 편집국장, 미군정청 공안국장 ·공보국장 등을 지내고 1947년 국립경찰전문학교 교장이 되었다.'
一
二
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