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붉은 제라늄 꽃잎 하나가 베란다 바닥에 떨어져 있다. 어젯밤 어디에선가 또 한 여자가 속울음을 깊이 울었는가 보다, 내가 모를 또 한 생명이 졌는가 보다, 생각한다. 오후가 시작될 무렵 제라늄을 담은 바구니 밖에는 그 사이에 떨어진 붉은 꽃잎들이 모여 있다. 꽃잎을 손끝으로 스치면 엉기다 만 피처럼 얼룩이 번진다. 아까 엄마가 걸어내려간 컴컴한 지하도가 생각난다. 엄마를 따라 나도 그 속으로 따라 들어갔어야 했을까.
불길한 예감. 여자의 직감은 어디까지 정확한 것일까. 민서를 만나 결혼해 사는 과정에 두 번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떤 적이 있다. 첫번째는 결혼날을 잡으러 그의 길음동 산동네 집에 갔을 무렵 그의 옛 여자가 나타났을 때였고, 두번째는 내가 그의 생일선물로 사준 난꽃들이 어처구니없이 빨리 져버렸을 때였다. 어쩌면 그 여자가 나타났던 때에 그는 내게서 떠났을 수도 있었다. 그의 옛 여자는 필사적으로 나에게서 그를 떼어내려고 했다. 그때 그의 옛 여자가 성공했다면 오히려 더 잘 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게 남았다. 그리고 양란의 꽃잎처럼 눈부시게 피어올라서는 후닥닥 숨을 거두었다. 후에 나에게서 더 오래 떠나려고 처음에 나에게 남았던 것일까.
'그 여자를 만날 자신이 없어 .'
나에게 뜻밖의 고백을 들은 준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미안해, 이런 일로 불러내서.'
나는 며칠째 가슴속에 담고 있던 것을 그에게 털어놓자 참담하기만 했던 심정이 어느 정도 평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 여자를 만나기 전에 객관적으로 나의 상황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어. 그때 마침 준이가 전화를 해줬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어.'
내 생각만으로 준이를 불러낸 게 미안하기도 했다.
'이런 상태로 그와 결혼할 수 있을까.'
나는 준이가 심판관이라도 되는 듯이 준이가 하라는 대로 할 것 같았다. 민서와 결혼한다는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될 즈음 군대에 가는 대신 태릉에 있는 사관학교에서 교양국어를 가르치고 있던 준이는 내게 전화를 걸어 지금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시인했다. 그러자 준이가 말했다.
'그냥 놀란 것이 아니라, 깜짝 놀랐어요. 둘이 그렇게 만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