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란서 안경원
세상을 12자, 8자 통유리로 들여다보고 이해하기까지…… 지나치게 많은 시간들이 필요했다. 그것은 어쩌면 삶과의 전의(戰意)를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단 한번도 내 일생을 통해 거사를 꿈꾼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직 무엇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지 나는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 시간은 고집을 부리며 내 옷소매를 잡아당길 게 분명하다. 아직 견뎌야 하는, 내 나이는 그런 나이다. 나에게 삶이란 단지 오늘을 견디는 것, 바로 그것뿐이다. 아직 더 견뎌야 했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내게 삶을 견디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없다.
새 안경을 쓰고 이십여 분이 넘도록 할머니는 각도를 달리하면서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고 또 보았다. 처음 굴절검사기를 통해 할머니의 동공을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온몸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었다.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할머니의 동공에 얼핏 검은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환시가 틀림없었을 테지만 어쨌거나 나는 할머니의 죽음을 미리 감지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다행히 오른쪽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 검은 그림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화면 속 할머니의 동공에는 이미 죽음의 지층이 깊이깊이 쌓여 있다고, 나는 무턱대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 뒤로 나는 할머니가 안경테를 맞추러 올 때마다 어쩌면 이것이 할머니가 세상에서 쓰고 가는 마지막 안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손끝이 떨려오는 것을 분명하게 느껴야 했다.
스위스 안경원과 계약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환자들의 처방전을 내 가게로 보내겠다고 말하며 그는 조금 웃어 보였다. 나는 어쩐지 입 끝을 실룩거리며 웃는 그의 웃음이 불결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한 뒤 나는 엽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의자등받이에서 몸을 떼어내며 그가 이번 주는 휴무일 텐데 시간이 있느냐고 물었다. 미라보 다방 최양이 나와 궁인덕 원장을 자꾸만 흘금거리는 게 느껴졌다. 언젠가 최양이 궁인덕 원장이 요구했던 체위를 견디지 못하고 여관방을 뛰쳐나왔다는 말을 한 것이 생각났다. 최양이 배달보자기를 싸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나는 심하게 얽은 자국이 난 궁인덕 원장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시간은 없다, 그리고 고맙지만 처방전은 받지 않겠다며 딴에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라보 다방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자꾸만 허청거렸다. 내가 우습게 보이는가 당신들……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불란서 안경원>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1996년 섬세한 문체미학과 세련된 내면묘사가 돋보이는 장편소설 <식빵굽는 시간>으로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을 수상함으로써 우리 문학의 내일을 이끌어갈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했다.